고대 그리스 비극 작가 가운데 여성 캐릭터 묘사에 특출했던 에우리피데스는 여성 인물을 내세운 작품을 유독 많이 남겼다. 〈타우리스의 이피게네이아〉도 그중 하나다. 이피게네이아는 고고한 희생과 용서의 태도로 피를 피로 되갚는 무한 복수의 고리를 끊어내고 존속살해로 이어지는 비극의 역사를 끝낸다.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에 이어지는 내용으로, 아가멤논 가문에 내린 저주의 대단원에 해당한다.
그리스 비극 작가 가운데 가장 많은 작품이 전해지고 있는 에우리피데스는 여성 인물 묘사에 특별한 재능을 보였다. 이피게네이아, 헤카베, 헬레네, 안드로마케, 메데이아와 엘렉트라까지 신화 속 여성들은 에우리피데스의 손에서 생명력 넘치는 개성적인 인물로 다시 태어났다. 그중 이피게네이아는 에우리피데스뿐만 아니라 라신, 괴테 등 후대 극작가에게 영감을 준 인물이다. 아가멤논과 클리타임네스트라의 딸로 아버지 아가멤논에 의해 희생되는 비극적 운명을 타고났다. 신은 트로이와의 전쟁에 나서려는 그리스군에 다른 누구도 아닌 이피게네이아의 순결한 피를 대가로 요구했고, 아가멤논은 대의를 위해 딸의 목에 직접 칼을 겨누어야만 했다. 에우리피데스는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와 〈타우리스의 이피게네이아〉 두 작품에서 무고한 이피게네이아의 희생을 묘사하며 “신적 정의란 무엇인가?” 묻는다.
〈타우리스의 이피게네이아〉는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 후속편이다. 전쟁을 위해 제물로 바쳐진 이피게네이아가 살아남아 타우리스의 사제가 된 사연을 비추며 시작된다. 이어 전쟁이 끝난 뒤 고통스런 삶을 이어 가고 있는 인간들의 모습이 재현된다. 그리스 전군을 진두지휘했던 아가멤논은 아내의 손에 살해당했고, 오레스테스는 복수의 여신들에게 끝없이 쫓기는 신세다. 헬레네는 트로이와 그리스 여인들의 공공의 적이 되었고, 메넬라오스는 헬레네를 되찾았지만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망망대해를 헤맨다. 트로이 전쟁의 최초 희생자였던 이피게네이아만이 타우리스라는 낯선 땅에서 사제로서 소명을 다하며 무사한 날들을 보내고 있는 듯 보인다.
그리스 극에서 인간은 항상 왜소한 모습이다. 모든 것이 이미 운명으로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불가해한 신의 힘이 운명을 좌우하며 그 속에서 인간은 절대 의지대로 살아갈 수 없다. 모든 시련과 그 극복에 신의 뜻이 개입되다 보니 인간은 그저 신들의 놀이판 위에 놓인 말처럼 보인다. 하지만 에우리피데스는 인간을 신들의 꼭두각시로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성을 발휘해 절제하는 인간, 인간적 존엄과 가치를 실현하는 인간상을 제시한다. 이피게네이아는 대가를 바라지 않는 희생, 지극한 가족애, 용서를 베푸는 태도로 인간이 왜 만물의 영장인지를 보이는, 에우리피데스적 인간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