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유럽선언

사회적 유럽선언

  • 자 :콜린 크라우치
  • 출판사 :페이퍼로드
  • 출판년 :2021-06-22
  • 공급사 :(주)북큐브네트웍스 (2022-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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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편이 아닌 자를 증오하라?”



선택적 정의가 일상화된 사회,

선동과 혐오의 부추김 속에 길을 잃어가는

현대 시민 사회를 위한 희망의 조언

“분노가 일으킨 당신의 정의를 의심하라!”



동명의 베스트셀러인 분노하라처럼, 한때 우리는 “분노하라”는 말을 진보의 모토로 여겨왔었다. 무관심과 침묵은 최악의 태도이며, 불평등에 분노하고, 차별에 분노하며, 양극화에 분노하고, 그 외 모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에 분노하면서, 합리와 이성이 구분해낸 불의와 부당함에는 주저 없이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일이라 여겨왔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뒤집히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증오와 혐오의 감정 아래 저마다 쏟아내는 목소리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 목소리들은 무관심과 침묵이 최악의 태도라 주장하며, 합리적 의심과 정의라는 말로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해댄다. 동시에 목소리에 반대되는 모든 것들을 거대한 음모에 싸인 비리 혹은 부조리한 집단의 간계라며 공격해댄다. 작게는 어느 청년의 죽음에서부터 크게는 정권 단위의 사건에 이르기까지, 보다 일상적으로는 복지와 차별에 대한 논쟁까지, 목적과 수단이 뒤바뀌며 가해자와 피해자가 자리를 바꿔 공수 교대하는 이러한 모습은 일관되게 관찰되어진다.

한때 유럽과 대한민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는 분배와 복지, 차별에 관해 조금이지만 합의를 이루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중간에 코로나19의 창궐이라는 사건을 포함한 몇 년의 기간 동안 애써 이룬 사회적 동의는 하나씩 종이조작이 되어버렸다. 한때 진보의 주요 도구였던 정의와 분노, 합리적 이성은 그 반대 진영이 즐겨 찾는 도구가 되어버렸고, 진보의 행동은 그게 어느 것이든 증오와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렸다. 진보든 보수든 모두 입을 모아 “자신의 편이 아닌 자를 증오하라”고 이야기한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합리라는 이름으로 이기심을 부추기는 신자유주의

정의라는 이름으로 증오를 부추기는 혐오주의

“두 개의 유령이 우리 사회를 배회하고 있다!”



저자는 이 모든 것의 뒤에 우리 사회를 떠도는 두 개의 유령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150년 전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이 소개한 유령이 당시부터 지금까지 사회와 정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듯, 신자유주의와 혐오라는 이름의 이 두 유령은 대중들에게 이론과 감정의 근거를 함께 제공하며 사회 구성원 전체를 ‘정의’와 ‘합리’라는 이름하에 미쳐 돌아가게 만든다.

유령 중 하나인 신자유주의는 “노력해서 얻은 개인의 재산은 보호받아야 한다”는 주장 아래, 복지와 환경을 비롯한 우리 사회의 온갖 문제를 무력화시켰다. 동시에 유령 중 다른 하나인 혐오주의는 민족주의와 애국심이라는 이름 아래 시민의 증오를 집중시킬 대상을 발굴해냈다. 브렉시트의 결정 뒤에는 “우리의 일자리와 이익을 빼앗아간 무슬림들에게 앞으로 투표권은 물론 나라 전체를 넘길지도 모른다”는 위기마케팅이 가해졌었다. 신자유주의는 2008년 경제위기의 원인이었지만, 이제는 그 안에 신자유주의자들을 용인했다는 이유로 진보 정당들이 더 거센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트럼프 당선 이후, 우리 민족, 우리 국가의 이익을 위해 국가의 벽을 걸어 잠그는 일이 당연시되었다. 그리고 팬데믹의 시대를 맞아, 경제 분야가 주류이던 이런 발상은 ‘위험한 외국인’을 자국에 들이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으로까지 발전되었다. 어느덧 우리는 이 두 유령이 일으킨 부정적 분위기를 일상적 여론과 구분하기 힘들어졌다. 이들이 일으킨 빙의의 결과, 대한민국이든 유럽과 미국이든 혐오 발언과 혐오 범죄가 일상화되었고,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이것이 정치인들의 주요 레퍼토리가 되어버렸다. 아이러니하게도 모두가 정의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은 외노자, 중국인과 일본인, 심지어는 남성과 여성, 세입자와 집주인까지 전방위로 혐오의 대상이 되는 증오의 용광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합리적 의심’과 ‘정의’라는 이름하에 조롱과 선동을 조장하는 저들에 맞서, 과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 남았을까?



혐오가 아니라 희망Hope not hate의 세상을 위하여

만국의 시민이여 연대하라!



이 책은 두 개의 유령 아래 점점 비이성적이 되어가는 사회, 전 지구가 국가라는 벽에 갇혀 극도의 이기심을 추구하는 현실에 맞서는 하나의 시도다. 불평등과 환경, 팬데믹의 경우까지 현대 사회는 하나의 국가로는 맞설 수 없는 위기에 봉착한지 오래다. 그 위기를 넘기 위한 국가 간의 협력 혹은 연대는 발전 도상의 단계에서 이기심과 혐오를 통한 봉쇄에 자리를 내주기 일보직전이다. 코로나19라는 현실은 우리 사회의 많은 것을 파괴시켰고, 또 거꾸로 되돌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팬데믹이 파괴한 분야가 너무 광범위하기에, 발전해나갈 여지를 많이 만들었다는 발상도 가능하다.

개개인의 역량에 맡긴 채 국가의 개입 없이 코로나19에 맞서는 일은 불가능하다. 하나의 기업도 마찬가지다. 같은 식으로, 전 세계에 걸친 위험 앞에 문을 닫아건 하나의 국가가 대항하는 일도 가능하지 않다. 책은 개인, 집단, 국가를 넘어선 전 세계에 걸친 연대를 제안한다. 그리고 그 연대의 성공을 위해 국가, 집단, 개인이 추구해야 할 목적을 선언처럼 제시한다.

마치 팬데믹처럼, 두 개의 유령은 이미 국경과 무관하게 세계를 횡행하고 있다. 중도와 진보 진영은 제3의 길이라는 해묵은 이론 뒤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사분오열되었고, 결코 친하지 않던 신자유주의와 혐오주의가 파편화된 진영을 포섭하기 위해 손을 잡아버렸다. 그리고 이 둘이 보일 수도 잡을 수도 없는 유령처럼 배회하며 우리 사회를 증오와 선동의 사회로 바꾸어가고 있다. 책이 제시하는 분석은 다양하지만, 결론은 단 하나다. 혐오와 증오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힘을 합치는 것이다. “국경을 넘는 위기에는 국경을 넘어 맞서야”하며, 우리는 “혐오를 넘은 희망Hope not hate”의 세상을 이루어내야 한다. 만약 실패로 돌아간다면, 중도우파에서 좌파에 걸쳐 파편화된 다수에게, 극우파 중에서 나온 완고한 소수가 승리하는 심각한 결말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재분배적 과세와 공공 서비스 제공을 거부하는 신자유주의적 발상은 가난이 대개 무기력과 게으름에 기인하며, 자칭 ‘노력해서’ 성공한 부자들과 중산층들의 재산은 보호받아 마땅하다는 주장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 심지어 혐오조차도 종종 도덕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다. 진정한 동기가 무엇이든, 사람들, 특히 정치 지도자들은 그들의 행동을 도덕적인 관점에서 제시할 필요성을 느낀다. (...) 이기심과 배제의 호소들은 단순하고 쉽지만 어둡고 사나운 목적지로만 이어질 뿐이다. 협력과 포용에 대한 요구들은 더 부담되지만, 그것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더 큰 궁극적인 보상을 가져다준다.”

- 책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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